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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양심과 청렴이성보 거제자연예술랜드 원장
톨스토이의 작품에 ‘큰돌과 작은 돌’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두 여인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한 여인은 젊었을 때 남편을 바꾼 일에 대해 괴로워하면서 자신을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짓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노인은 앞에 말한 여인에게는 큰 돌 하나를, 그리고 뒤에 말한 여인에게는 여기 저기서 작은 돌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두 여인이 돌을 가져오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제자리에 갖다놓고 오라고 했다.

큰 돌 하나를 가져온 여인은 쉽게 제자리에 갖다 놓았지만, 작은 돌을 여기 저기서 가져온 여인은 제자리를 일일이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 때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니라”
즉, 큰 죄는 쉽게 구분되나 작은 죄는 깊이 빠진지도 모르고 지내기가 십상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백이 숙제(伯夷 叔齊)’를 생각한다. 그들은 은(殷)나라의 신하로서 주(周) 나라에 충성을 바칠 수 없다고 결심하고, 주 나라의 곡식을 먹는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

그들의 절개가 과연 우리의 현실사회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게 살고자하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는 오늘의 공직자에게 큰 교훈이 되리라본다.

물론, 우리는 굶고 가난한 청빈 보다는 배부르고 넉넉한 번영을 바란다. 그러나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릴 수 있는 권력은 언제나 청빈하여야 한다. 권력이 살찌면 국민은 가난해지고, 권력이 결백할 때에만 국민은 살찌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다고 하는 ‘선과 악’.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칼로 베듯이 확실하게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선지여악(善之與惡)이 상거하약(相去何若)이라’하여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나타내었다.

사람은 아무리 나쁜 놈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나쁜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조금도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과학은 산성과 알칼리성을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도 만들고, 거짓말을 탐지하는 기계까지 만들어 냈으나 아직은 잘잘못을 구별하는 기계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선과 악을 가려내야 하는 것인가.

모호하나마 그 어림가름을 각자의 양심의 판단에 의할 수밖에 없다. 라스키의 말과 같이 양심은 빈약한 지도자이기는 하나 유일한 지도자이니까.

대통령의 측근이 수뢰 혐의로 구속되는가 했더니 부산시장도 구속 수감되었다. 부정부패가 그 당사자를 살찌우는 것으로 끝난다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그 파급효과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부정부패 행위자의 몰염치한 치부의 이면에는 허덕이는 대중의 생활고가 있고, 시들어 가는 국가의 운명이 있다.

일찍이 마케도니아 왕 필립은, “황금을 실은 마차가 들어갈 수 있는 도시라면 어디든지 점령할 수 있다”고 했다.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다 정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쟁에 의해서 빼앗긴 곳에는 싸우다가 죽은 전사의 넋이라도 남는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망한 곳에는 수모와 한탄이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소득 2만불을 지향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돈에 결백한 이 땅의 백이 숙제는 여전히 요청된다.

다만, 오늘의 백이 숙제는 돈을 떠나서, 돈에 결백한 사람이 아니라, 돈을 다루고 국민을 배불리 하면서도 스스로 돈에 초연한 사람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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