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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바다김무영

나도 모르게 또 달려와 고향 마을을 바라다본다. 고향집 앞에서 아직도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니였다. 바로 앞은 백사장, 그 길로 30미터만 가면 파도 너머로 수평선이다. 수평선 저 멀리로 할아버지께서 현해탄과 타이완 해협을 넘나들다 떠나셨다. 그 바다가 한이 되어, 바다를 그리다 아버지도 배를 탔다. 작은 아버지도, 삼촌도 따라 배를 탔다.
어머니의 바다는 할아버지와 삼촌을 앗아간 한의 바다였지만, 가문을 살리고 가정을 꾸리는 고마운 바다였다. 그래서 거의 매일 오줌통을 이고 바닷가 예감자밭에 나가는 일이 일상이 돼버렸다. 그곳에서 한의 바다를, 그리움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게를 졌다. 겨울방학 때는 일 년 땔감을 해야 하기에 형이 사회로 진출한 그 시기부터 지게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은 목을 다쳐 일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수술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제법 넉넉한 살림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일군도 부릴 처지가 못 되어 초등학교 이전부터 소를 몰고 나갔다. 어느 날 소를 풀어놓고 소군 대장에게서 교육을 받고 있는 사이에 소만 외양간으로 내려오자 나를 찾아 어머님이 산이 울리도록 외쳐댔다. 소를 잊었다고 울면서 내려오니 소는 벌써 제집을 찾아와 있고 어머님만 나를 찾아 외치고 있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월사금이 50환이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내었고 그날도 당연히 이야기만 하면 월사금을 가져갈 줄 알았는데 어머님의 수중엔 50환이 없었던 모양이다. 조르고 조르자 어머님은 이웃집에서 50환을 빌렸다.
한 참 궁할 시절 어머님은 새벽에 25리나 떨어진 일터에 나가셨다. 마치고 돌아오면 한 밤 중이었다. 불빛도 없는 소름이 돋는 그 길을 어떻게 다녔을까? 창고를 짓기 위해 어머님이 손수 블록을 찍어 만들기 시작했다. 미장은 또 어디서 배우셨는지, 양철로 지붕을 이고, 문도 해달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님은 4반세기 넘게 마을 부녀회장을 역임했다. ‘3년 터울로 셋만 낳아 잘 기르자’ 정부의 가족계획을 빈틈없이 수행하였고, 분만도우미 교육도 이수하여 산부인과가 없는 시골마을에서 분만소식만 들으면 달려갔다.
아버지께서 배 타는 학교에 가라는 것을 어머님은 나를 인문계에 보내고 없는 형편에 대학도 진학시켰다. 그러나 당시 10.26 사태의 원인이 된 부마사태의 가담자로 해서 전방으로 갔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조선소에 취직했으나 1년도 다니지 못하고 나왔다. 마을 청년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고 낮에는 백사장청소, 야간에는 방범활동을 하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해서 어머니는 남은 전답을 헐값으로 매도하여 더 이상 진로를 방해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게 했다.
그 후로 경비며, 막노동, 서적판매며, 정처 없이 떠도는 나를 중심에 두기 위해 어머님이 직접 원서를 제출했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군청에서 과장도 하는데 너는 무엇이 모자라노.’ 그때는 이미 어머니께서 마지막 소원을 하고 있는 때였다. 암이 몸 전체로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 나는 보트 17척을 팔아서 어머니의 병이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되었는지 그 원인을 진단해 달라고 했다. 입원 두 달 동안 어머니는 입원할 당시보다 더 초췌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집으로 모시라는 의사의 말을 따를 건데….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에 합격했으나 공무원은 별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 하느냐, 마느냐 그 갈등이 지속되었다. 인사담당자는 ‘수가 모자라 다시 공모를 해야 한다’는 말에 쉬 그만 두겠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어머님의 소원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드디어 공직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공직생활 두 달 만에 어머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쩔 수 없이 보내드려야 하지만 말썽만 부린 내가 미웠다. 어머님의 소원도 들었고 그래서 나는 항상 사직서를 지니고 다녔다. 어떤 일이 내게 주어지면,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만둘 작정이었다. 물가를 잡고 전국 노점상들이 몰려오고 그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떤 때는 젊은 혈기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한판 제대로 해서 이 기회에 사직을 하는 게 나을 법도 했다. 어차피 그만 둘 공직인데….
또 세월이 흘렀다. 그만둘 생각을 잡는 일이 더 늘어났다. 자식이 태어나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느끼기 시작한 것, 그 시기에 새로운 일을 맡고 그런 생각은 없어지는 듯 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다른 일들을 생각했다. 그렇다고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정처 없이 방황하는 청소년들 마냥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엇이 생의 의미를 더하는 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다 문제투성이 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 그래서 전방 생활동안 종교에 심취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이웃마을 예배당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끈 없는 검정운동화를 사 주셨다. 신지 않고 아끼다가 주일 예배당에 신고 갔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 신발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맨발로 신장로를 걸었다. 돌부리에 찢겨 피가 났다. 어머니는 그 광경을 보면서 ‘남은 신발이라도 신고 오지’ 나는 막무가내로 남의 신발을 왜 신고 오냐고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날 뒤로 예배당에 가지 않았다. 그 예배당이 그 때까지 나를 안고 있었고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는 것을 철들어서 알았다.
한번은 내가 군불을 지피던 부엌에서 뒷정리를 않고 나와 불이 붙어 지붕까지 불길이 치솟았다. 동네사람들이 불났다고 외치며 물동이를 들고 바닷물을 길어 날랐다. 그 위급한 순간에도 어머는 담담했다. 그렇지 않아도 겁먹은 내게 더 큰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써 삭이며 내 등만 두드렸다. 이웃 마을에서 콩쿨대회가 열렸다. 냄비, 솟, 비누며 생활용품을 상품으로 내걸었기에 어머니는 노래도 잘하셨지만 그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살림에 보태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석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몸이 아파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나를 업고 등교했다. 선생님께서 결석처리 하지 않을 테니 데리고 가라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몇 시간이라도 앉아 있겠다고 했다. 3일 동안 아팠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동안 지각은 물론 결석한번 하지 않았다. 개근상은 6년 연속으로 받았지만 졸업 할 때는 6년 정근상을 받았다. 진정한 개근이 아니라고 어머니가 내게 정의를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 뒤로 중학교 3학년을 거쳐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았다.
어느 봄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였다. 4월 쯤 됐을 것으로 기억난다. 참꽃이 만발한 뒷동산 아래서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신이 났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보았다. 잘 드시지 못하는 술로 볼은 붉어 있었고, 신이 나서 즐거움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님도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육자배기든 디스코풍이든 따라서 자유자재로 장구와 몸동작은 거의 프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엄청난 열정들을 표출하지 못하고 어머니는 속으로 얼마나 애태웠을까! 오로지 가진 것 없이 사는 것이 어머니의 거룩한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안간힘으로 살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 밑에서 어업활동을 익혀 근착선의 어로장이 된 앞집과 뒷집 아저씨들에 허락하지 않았던 자존심, 비록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자식들 교육만큼은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혹독하게 가르쳤다. 초등학교 5학년쯤인가 겨울방학 숙제로 국민교육 헌장을 외워오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여덟 번을 읽고 외워보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외우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나의 신통함(?)을 아시곤 아버지께 부산으로 이사를 가지고 졸랐다. 그러자 아버지는 ‘우리 조상들 산소는 우짤끼고, 절대 안된다’ 불호령이 떨어지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내게 어머니는 주산을 가르쳤다. 4살쯤 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덕분에 산수와 수학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우지 않아도 알아서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서 기초만 배운 응용문제를 내어 등위에 드는 학생들에게 답을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자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누가 어떤 답을 쓰고, 그 답의 정오를 밝히지 않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에는 말이 너무 많아 그런 별명도 따라다녔는데 혹독한 사춘기가 말문을 막게 한 것이다. 그 당시 삶은 무엇인가, 인간은 과연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 어떤 삶이 진정한 삶인가, 이런 등등의 문제에 빠져 들었다. 고전일기 대회도 나갈 만큼 많은 책도 읽었지만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딱 한 갑 나이에 오진으로 인해 병을 키우시다가 운명을 달리하셨다. 내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 온 것은 부모님을 모시고 2백년이 넘은 고향 집과 조상의 산소를 돌보며 마을을 개발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나는 초등학교 이전부터 아무리 잠이 와도 제사지낸다면 벌떡 일어났다. 군복무 때에도 벌초 때를 맞춰 휴가를 받을 만큼 제사와 조상을 모시는 일에 충실하였다. 그것은 어머님에게로부터 배운 것이다.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다 바다로 갔을 때 어머님은 홀로 제사를 모셨고, 벌초도 직접 하셨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나도 모르게 예감자밭에 와 있다. 고향마을에서 동네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 바다에서부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머님의 가르침이 파도가 되어 끊임없이 백사장으로 밀려오고 있다.

 

거제중앙신문  skok@geoj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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