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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사람강중현씨의 한많은 이야기
이금숙 전 거제시민신문 편집부장
세계항공 거제지사장


지난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53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10년의 강산이 다섯 번이나 지나간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지는 옛날의 폐허가 아닌 한국전쟁의 산교육장이자 또 다른 이념의 전쟁터로서 세계적인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재조명 받고 있다.

원래 전쟁은 침략자의 횡포라고 하지만 빼앗은 자도, 빼앗긴 자도 서로가 말할 수 없는 동족 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이제 참전용사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던 생존 포로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 53주년을 맞아 지난 6일부터 많은 참전용사와 반공포로들이 이곳 포로수용소를 찾고 있다.

지난 22일 국군전쟁포로로 잡혀와 포로가 아닌데도 3년간을 포로로써 생활했던 김중현씨(75·당시 22세)의 생사를 넘나들었던 한 많은 포로시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난 22일 일요일 아침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중현씨는 혼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찾았다. 김씨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

처음은 1차 개관 때였고, 이날은 혹시 이곳을 다녀간 방문자 중에서 한국전쟁 당시 자신과 함께 포로가 됐던 사람중에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혹여 다녀갔는가 싶어 방명록을 보러 왔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매일 몇 천명에서 1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포로수용소를 다녀가고 있는 터라 자신이 수용됐던 71수용소 국군전쟁포로들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이 김씨 스스로 얼마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맘때가 되면 그들이 생각나 발길이 자연스레 이곳으로 옮겨지더라는 것이다.

방명록을 열람하다 만난 김씨의 고향은 진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7월 징병 1기로 부산 문현동에 있던 육군 중앙훈련소에서 3일간 교육을 받고 경북 영천 전투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김씨가 배치돼 있던 21사단 1대대 화기중대는 10월17일 38선을 넘어 동두천을 지나 중부전선인 연천전투에서 승리한 뒤 묘향산을 거쳐 평북 전투까지 진격하게 됐다.

그러나 김씨의 부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진격을 중단하고 연변을 지나 청천강을 건너 박천, 평남 덕천까지 후퇴하다 덕천지구 전투에서 부대전체가 포위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중공군의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그때가 50년 11월26일 밤 9시쯤이라고 김씨는 기억했다.
“당시 중공군은 말 그대로 나팔불고 피리불고 물밀 듯이 밀려왔고 1대대는 지휘관도 없이 부지휘관의 지휘 잘못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잡히고 말았다. 중공군은 우리나라 국군포로들을 어느 마을의 마굿간에 가둬놓았고 더러는 폐광의 굴속에 가둬놓기도 했다. 그리고는 전투때마다 그들의 총알받이로 적진에 내몰았다”

김씨의 증언은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국군포로들과 인민군 의용군들이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총알받이로 이용됐다는 것과 일치했다.

제네바 협정에 의해 군인이 포로가 되면 적군이던 아군이던 국제법에 따라 처리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중공군은 우리나라 국군포로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씨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도 언제 총알받이로 불려나갈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1·4후퇴로 중공군이 강원도 횡성까지 내려오게 되자 김씨도 조선족인양 싶은 중공군 장교와 인민군 1명과 함께 후방고지로 정찰을 나서게 됐다.

그때 김씨는 어차피 죽을 바에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 기회를 봐서 탈출할 계획을 세운 뒤 어두워진 틈을 타 죽을 각오로 아군 진지를 향해 내달렸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몇번씩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탈출한 날이 50년 음력으로 섣달 그믐이었고 양력으로는 2월5일이었다는 것. 총을 뒤집어 메고 골짜기를 지나 아군 전선 지휘소까지 달려온 김씨는 자신의 군번과 부대를 밝히고 국군낙오병이라고 말한 뒤 자대복귀를 호소했으나 전방부대 지휘관은 군인이 아닌 월북자로 취급했다.

그리고 김씨는 며칠 뒤 대위계급장을 단 장교 한명과 함께 전방대대 지휘소까지 불려가 그들의 포대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말하라고 했지만 폐광속에 갇혀 있던 김씨가 모른다고 하자 전방부대에서는 김씨를 자대복귀도 시키지 않고 충주경찰서 유치장으로 자신을 이송시켰다고 회고했다.

김씨에 의하면 그 당시 중공군에 많은 장교들도 포로로 잡혔지만 탈출에 성공한 장교들은 원대복귀 시키고 사병들은 국군 포로로 분류, 수용소에 강제 이송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김씨는 자신의 관등성명과 부대를 밝혀도 이를 알아주지도 않는 우리나라 장교들에게 분노와 실망감을 느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송환을 거부한 채 포로석방을 요구해 풀려났지만 병력기피자라는 멍에를 쓰고 명예회복은 고사하고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한 채 한 맺힌 세월을 50년이 넘게 살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김씨의 군대생활은 한국전쟁 참전이 아닌 포로의 삶이었고, 반공포로도 아닌 국군 전쟁포로로써 제1북송대상이 돼야했던 처절한 아픔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경험했던 장본인이다.
그는 충주경찰서에서 대전 형무소로 다시 부산 거제리를 거쳐 51년 3월경 거제도로 이송됐다. 그가 제일먼저 수용됐던 곳은 68수용소.

그후 김씨는 지금의 고현시장이 있는 71수용소에서 수용소생활을 하다 다시 65수용소로 가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국군포로 송환거부를 외치다 마산으로 이송돼 그곳에서 석방됐다.

매일같이 인민재판이 열리고 시위대와 데모대들이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수용소 안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고 아수라장이었다.

어떻든 살아 남아 명예회복을 위해선 못할 일이 없었다는 김씨. 그도 수용소에서 같은 사단의 장교도 만났고 고향 친구도 만났지만 서로가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관계로 모르고 지내는 게 상책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쟁에 참여하고도 전쟁용사가 아닌 병역기피자로 전락해 젊은 나이에 직장도 구하지 못하고 모든 국가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 김씨는 국방부와 보훈처에 여러 통로를 통해 탄원서를 올린 결과 전후 47년만인 1998년 한국전쟁 참전용사증을 발급 받았다.

그러나 이날이 있기까지 그가 겪은 ‘한’ 맺힌 세월은 과연 얼마일까. 하루도 아니고 더구나 47년의 세월에 3년의 포로생활까지 합쳐 50년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병사의 기록은 남아 있을 텐데 왜 그는 영웅이 되지 못하고 국군포로로 송환될 위기까지 내몰렸을까.
결혼해서 5남매의 아버지로 살아오면서 가장 억울했던 시간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억류생활이었단다.

지금도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을 왜 수용소로 보냈는지 이해가 안간다며 명예회복을 위해 죽는 날까지 관계기관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겠노라 했다.

그리고 김씨는 포로수용소를 돌아보며 고쳐야 할 몇 가지를 지적했다. 잘못 쓰여진 역사는 그 증인들이 살아 있을 때 바로잡아져야 한다며….

김씨는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이 있는 건 순전히 나라를 위해 몸바친 호국 영령들과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공산국가로 변해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휴전이 되고 얼마 후 그의 이야기는 부산국제신보에서 ‘거제도 일기’라는 책으로 출간됐다고 한다.

언젠가는 죽기 전에 한번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찾겠노라고 말한 뒤 자신이 부산에서 LST함을 타고 왔던 그 뱃길을 따라 초로의 김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전선으로 되돌아갔다.

가면서 김씨는 자신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자신뿐만 아니라 나 같은 또 다른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규명돼 그들의 처절했던 삶이 위로 받을 수나 있게 해 달라고 거듭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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